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토목의 변 (문단 편집) === [[경태제]] 옹립과 베이징공성전 === 명나라 조정은 남경에 남아있던 제2조정의 신하들이 주축이 되어 남경으로 천도할까 진지하게 논의했지만, 병부시랑 [[우겸]](병부상서 광야는 토목보에서 사망)이 총대를 메고, 남쪽으로 도망간 [[송나라]]의 예를 들어가면서 강력히 반발한 까닭에 간신히 진정되었다. 그리고 황제가 포로로 잡힌 상황에서 본국에 황제가 없으면 안 되니까 정통제의 이복동생 주기옥을 황제로 옹립하고, 국가 위기 상황에서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태자는 있어야 하므로 정통제의 장남 주견심을 황태자로 책봉하였다.[* 이때 정통제에게 아들이 둘 있었고 주기옥에게는 아들이 1명 있었는데, 이 같은 정황으로 볼 때 국가 위기 상황에서 두 돌이 채 안된 정통제의 장남을 황제로 세우는 것은 위험이 크다고 여겨 당장은 직무 수행이 가능한 주기옥을 황제로 세우고 대신 정통성 확보와 정국 안정을 위해 정통제의 아들을 황태자로 삼아 이후의 황위는 정통제의 자손들이 잇도록 만드는 쪽으로 타협을 본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베이징 방어의 총책을 짊어진 우겸은 거의 총력을 다해 남경의 무기와 병력을 이동시키는 등 방어전력을 모으고 전쟁에 대비하였다. [[파일:external/s3-eu-west-1.amazonaws.com/B001673.jpg|width=600]] 명나라가 그럴 동안에 에센은 우선 정통제를 앞세우고 명나라 변방을 돌아다니면서, 각지의 요새들을 무혈점령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베이징처럼 요새화된 도시를 공략하는 건 상당히 다른 차원이라서, 여러 요새에 공격을 시도해봤지만 격퇴당하고, 남쪽에서 근왕병들이 속속 증원되어 올라오자 베이징 공략은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사로잡은 [[정통제]]를 이용해 협상하려 했는데, 이때는 이미 명나라는 [[경태제]]를 세우고 정통제를 버린 상태라 별 성과가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에센은 격노하여 군대 10만으로[* 다만 이는 과장이고 실제 병력은 7만~8만으로 보고 있다. 다만 몽골인 외에도 투르크인과 준가르인, 카자흐인 등 여러 유목 민족이 포함된 군대라서 당시 몽골로선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모조리 총동원했다.] 베이징에 쳐들어갔다. 그러나 명나라는 이미 예상하고 있던터라 22만명의 병력을 소집해 베이징에 모아 놨고, 장비들도 남경과 기타 지역, 심지어는 토목보 주변에 버려진 것까지 싹 회수해서 배치한 상태였다.---캐논밭--- 게다가 단순한 수성전이 아니라, 베이징 주변에 있는 옛 성의 성벽 등을 이용해서 주변에 진지도 다수 깔아 놓은 상태. 한마디로 토목에서 당했던 것과 차원이 다른 상태였다. 당시 명군 병사들이 화기를 '''휴대만 했지 사용법을 몰랐기 때문'''에 미사용 상태로 화기를 버렸다고 한다.[* 사실 이게 큰 문제였는데 병사들이 화기를 사용할줄 모르다보니 명군은 몽골군보다 화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는데도 정작 이 화약무기를 제대로 써먹지를 못하다가 당한것이다.] 에센의 몽골군도 역시 화기 사용법을 몰라 그대로 화기가 방치되었다. 몽골군이 화기를 활용하지 못했음은, 이들이 미개했기 때문이 아니다.전근대 화학 무기는 원리면에선 단순하지만 단순 격발에도 숙련도가 필요하다. 현대 화기는 미숙련 사용자를 위해 가능한 단순한 조작계를 추구하며 복잡한 화기는 간소한 매뉴얼이라도 끼워넣는다. 하지만 전근대 무기는 그런 배려는 거의 없고 훈련이 필수였다. 가령 명나라 화포를 조작하던 병사가 포르투갈 화포를 쓰기는 어려우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명나라 병사도 조작하기 어려워하는 무기를 몽골군이 조작하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몽골은 원나라가 건국되기 이전인 몽골제국 시절 이미 금나라를 통해 화약무기를 접했고, 이를 적극 받아들여서 사용했다. 이는 남송을 멸망시킬 때나 일본 원정을 갔을 때의 기록으로 찾아볼 수 있다. 혹은 화약이나 소모품이 부족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베이징 공방전에서는 그때의 교훈을 살려 병사들에게 화기 사용법을 숙지시켰기 때문에, 명군이 화력 면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다. 그 결과 몽골군은 창의문과 덕승문을 중심으로 벌어진 교전에서 명나라 포병의 공격과 수비군의 저항으로 1만의 사상자를 내면서[* 에센의 최측근 지휘관인 소로, 마오나하이가 전사하기도 했다.] 베이징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베이징을 구원하기 위한 명나라의 지원군 22만이 오고 있었기에 난감해진 에센은 베이징 공략을 포기하고 강화해 돌아간다. 그렇게 5일 동안 싸우고 돌아온 후, 오이라트 측은 정통제를 내세워 송환 문제를 포함한 협상을 진행시켰지만, 위에서 말했다시피 명나라는 이미 정통제를 버렸기 때문에 정통제의 송환 문제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에 에센 칸은 정통제를 더이상 데리고 있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1450년 정통제를 조건 없이 석방했다. 에센 칸은 정통제가 명나라로 돌아가서 반란이라도 일으켜주기를 바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